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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문학] 문정왕후의 흔적이 살아 있는 태릉과 강릉
황인희·윤상구|21세기북스

사진 촬영을 다니다보면 가끔 묘한 기(氣)가 느껴지는 곳이 있습니다. 그 ‘기’라는 것이 정말 보통 사람도 느낄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개인적인 느낌이 느껴질 때가 있지요.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만 왕릉 답사를 다니다보면 가끔 그 능의 주인의 삶과 능의 분위기가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을 더러 하게 됩니다. 그런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능이 바로 태릉입니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일대를 일컫는 ‘태릉’이라는 지명은 당연히 능이 있었기에 지어진 것인데도 능보다는 근처에 있는 시설물들이 더 유명합니다. 태릉선수촌, 태릉 푸른동산, 태릉국제사격장, 육군사관학교까지 능역을 침범한 시설들이 능보다 더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태릉에 들어가 보면 홍살문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능역 바깥 공간은 어수선하고 숲도 많이 훼손되어 능이라기보다는 놀이공원 같은 느낌이 더 많이 듭니다.

태릉은 제11대 임금 중종의 제2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 씨의 능입니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혼인한 지 17년 만에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을 낳았습니다. 당시 제1 계비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이 세자(훗날의 인종)로 있었는데 문정왕후는 세자를 제거하고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온갖 술책을 썼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자의 외삼촌 윤임을 주축으로 하는 편과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편으로 조정이 나뉘었습니다. 양쪽 다 윤 씨 집안이기에 사람들은 윤임 편을 대윤, 윤원형 편을 소윤이라 불렀습니다.

9-1. 태릉의 전경. 남자 못지않게 기가 세고 활달했던 문정왕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자를 죽이려 했던 문정왕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30세의 인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일단은 대윤이 득세하는 듯 보였습니다. 상황이 끝나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분노했던 문정왕후는 인종에게 다음과 같이 신세 한탄을 하였습니다.

“나야말로 이제는 외로운 자식(경원대군) 하나 보전치 못 하겠구나. 나는 아예 절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겠다.”

그런데 인종은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습니다. 왕이었지만 대비전 앞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며칠씩이나 빌어야 했습니다. 문정왕후가 간절히 바란 탓일까요, 아니면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일까요?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두 살의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이때부터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문정왕후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대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윤원형 일파는 대윤의 씨를 말리려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는 옥사도 일으켰습니다.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 “위로는 여왕이 집정하고 아래로는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보가 붙었습니다. 이 벽보를 계기로 당시 학계와 정계에는 또다시 커다란 피바람이 몰아닥쳤습니다.

1553년 문정왕후는 8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에도 명종의 뒤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명종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습니다. 앞에서나 뒤에서나 문정왕후가 정치에 관여하던 20년 동안 많은 옥사가 일어나 피바람이 일었고 국고는 탕진하여 백성들은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대궐에 대신의 부인들을 데려다가 호화로운 연회를 벌이곤 했습니다. 조선의 3대 도적 중 하나인 임꺽정이 활동하였던 것도 이때입니다. 한낱 도적에 불과한 임꺽정이 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지며 그를 잡으려는 관군을 나쁜 무리로 몰았던 당시의 상황은 민심이 조정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말해줍니다. 대단한 권세를 누리던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정왕후가 별세하면서 그녀의 지원으로 득세하던 그 모든 세력이 함께 몰락했습니다.

9-2. 높이 345㎝인 태릉의 문무석인은 당시 이를 지적하는 상소가 빗발칠 만큼 문젯거리였다.

원래 문정왕후의 남편 중종은 서삼릉의 정릉에 원비 장경왕후와 묻혀 있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이 점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터가 불길하다는 핑계로 중종만 선정릉의 정릉으로 천장했습니다. 자신이 그 옆에 묻힐 계획이었지요.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새로 옮긴 자리는 지대가 낮아 자주 물에 잠기는 곳이었습니다. 해마다 흙을 돋우느라 많은 돈을 들였지만 결국 헛일이 되었습니다. 문정왕후를 장사지내는 해 큰 홍수가 나서 한강물이 선정릉에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그곳에 장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는 남편 곁으로 가지 못하고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중종의 정릉을 태릉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두 번 천장할 수 없다는 주장에 밀려서 부부가 각기 따로 능을 이루고 있습니다.

태릉의 능침은 태조의 건원릉보다도 더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 문무석인의 키가 345㎝로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큽니다. 이를 지적하는 상소가 빗발칠 만큼 당시 그 규모가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문정왕후가 이미 세상을 뜬 후였는데 능을 <국조오례의>가 정한 규칙까지 깨고 웅장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기가 죽음에도 꺾이지 않고 계속 살아 있었기 때문일까요? 능호 자체도 ‘클 태(泰)자’를 쓴 것을 보면 문정왕후가 남자 못지않게 기가 세고 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태릉 근처에 사격장과 육군사관학교, 선수촌 등이 있어 총소리, 기합 소리, 구호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아 그 일대가 기가 센 터임이 분명해보입니다.

강릉은 제13대 임금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 심 씨의 능입니다.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바로 옆 태릉에 묻혀 있는 문정왕후입니다. 명종이 태어났을 때 중종의 적장자인 인종은 이미 20세로 세자 책봉이 된 후였습니다. 그러니 명종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종은 12세에 이복형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문정왕후와 명종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외척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탓에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명종이 20세 되던 해 문정왕후가 8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었습니다. 명종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명종에게는 올바른 정치를 도와줄 힘 있는 신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전히 문정왕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터라 수렴청정 때와 상황이 달라질 수 없었습니다.

9-3. 조선 왕릉 중 인석이 닿을 정도로 능침 사이가 좁은 왕릉은 강릉밖에 없다.

외척의 수탈로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설상가상으로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습니다. 국방도 허술해져서 이를 틈 탄 왜구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1555년에는 왜구가 전라도 연안 지방을 침입하여 민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을묘왜변이 일어났습니다. 또 명종 때에는 유난히 천재지변과 기상 이변의 기록이 많습니다. 1562년 음력 4월 4일에는 경기도 여주와 전라도 진안에 서리가 내렸는데, 사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4월에 서리가 자주 내리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바고,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반응하는 법이다. 지금 윤원형과 심통원이 조정에 자리 잡고 있고, 이량의 당이 요직에 포열하고 있다. 날마다 함께 도모하고 의논하는 것들이 나라를 그르치고 임금을 그르치는 계책 아닌 것이 없으니, 하늘이 잇달아 경계를 보임이 당연한 일이다.”

이 와중에 양주 출신 백정 임꺽정이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무려 3년 동안이나 전국을 누비며 관군을 괴롭혔습니다. 관군은 임꺽정을 체포하려고 수상한 사람은 마구잡이로 잡아들였습니다. 모든 관청은 일을 중단하고 임꺽정 잡는 데 나섰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는 양민들이 도적 떼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금을 깎아주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도적들이 판을 치는 사회 상황에 대해 <명종실록>은, 도적들을 비판하기는커녕 다음과 같이 조정을 비난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으면 교화가 밝아지지 못한다.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다. 춥고 배고픔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명종은 비로소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혼란해진 국정을 제자리로 돌리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2년도 안 돼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9-4. 강릉은, 어머니의 기에 눌려 평생 숨 한 번 크게 못 쉬고 살았던 명종 내외의 능이다.

명종은 아들을 하나 낳아서 5세 때 세자 책봉까지 했지만 그 하나뿐인 아들 순회세자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명의 왕비에 후궁조차 두지 않았던 명종은 순회세자를 잃고 더 이상 후사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명종은 조선 왕조에서는 처음으로 후사 없는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이는 젊었지만 명종은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을 미리 후계자로 정해두었습니다. 이 하성군이 바로 제14대 임금 선조입니다.

인순왕후는 12세 때 경원대군과 가례를 올렸고, 14세 때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녀는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선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정사를 제대로 돌볼 능력이 있다면서 1년 만에 물러났습니다. 인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둔 후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44세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능침을 나란히 마련한 쌍릉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고 열두 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두 능침 사이가 옹색할 정도로 좁아 병풍석을 제대로 두를 공간도 부족해 보입니다. 두 봉분의 병풍석 위로 튀어나온 인석이 서로 맞닿아 있을 정도입니다. 조선 왕릉 중에 인석이 닿을 정도로 능침 사이가 좁은 왕릉은 강릉밖에 없습니다.

명종의 장례를 치를 때 새 왕인 선조는 참석하지 않았답니다. 대신들이 선조가 어리다고 참석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지요. 새 왕은 참석도 안 한 채 대신들조차 잔 올리기를 꺼려했다는 명종의 국장은 겉만 번지르르한 행사였습니다. 어머니의 기에 눌려 한평생을 숨 한 번 크게 못 쉬고 살았던 명종은 저 세상에 가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은 셈입니다.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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