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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문학]옆구리가 텅 빈 외로운 홍릉(弘陵)
황인희·윤상구|21세기북스

 이제 동쪽의 아홉 기 왕릉인 동구릉을 떠나 서울의 서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서쪽에도 동구릉에 버금가는 왕릉군이 있습니다. 바로 서오릉입니다. 서오릉은 능 다섯 기와 원 두 기, 묘 한 기가 모여 있습니다. 왕실의 무덤은 능과 원, 묘의 세 부류로 나뉩니다. 능은 왕이나 왕비가, 원은 세자와 세자빈, 왕이 된 아들을 둔 후궁을 모신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기타의 후궁, 대군, 공주 등이 묻힌 곳은 묘라고 합니다.

서오릉에 가면 역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온 인현왕후와 그의 연적 장희빈, 그들의 지아비 숙종과, 뒤주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 어머니 영빈 이씨, 손자 연산군에게 폭행을 당했던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도 이곳 서오릉과 그 주변에 묻혀 있습니다. 특히 서오릉은 숙종의 가족묘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숙종은 물론 장희빈을 포함하여 네 명의 숙종의 왕비의 능묘가 모두 서오릉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서오릉에 가면 적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숙종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서오릉에서 가장 흥미로운 능인 홍릉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홍릉은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 1692〜1757) 서씨의 능입니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서 1704년 11세였던 연잉군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그 후 세제가 되었던 연잉군을 따라 세제빈이 되었다가 영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때 정성왕후는 33세였습니다. 정성왕후는 남편 연잉군이 완전한 권력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함께 위기를 겪고 함께 노심초사하고 남편을 보호하려고 애를 쓴, 영조 등극의 공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천신만고 끝에 남편 연잉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영조는 32세, 정성왕후는 34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정성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당파를 둘러싼 신하들의 극성스러운 행태를 온몸으로 겪은 영조는 강력한 왕권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왕권 유지는 역시 탄탄한 후계자 확보에서 비롯되지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건강한 아들의 탄생이 무척 기다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왕자 경의군이 있어 조금은 위안을 삼을 수 있었습니다. 위안 정도가 아니라 정성왕후는 경의군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일곱 살 때 세자로 책봉된 경의군은 열 살 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바로 효장세자이지요.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홍릉을 지키는 호석(虎石).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설치하였다.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정성왕후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성왕후는 효장세자의 죽음의 원인을 조사하다가 그가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의 나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제수가 시숙의 독살을 사주했다는 설이나 큰어머니가 조카의 독살을 사주했다는 설이나 정말 불행한 역사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한 방씩 펀치를 주고받아 공평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흉측하고 잔인한 일들이 실재 일어났다면 대궐이라는 곳은 정말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분위기를 알면서도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그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후인 영조 11년에야 후궁인 영빈 이씨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한 그동안의 세월은 영조에게도 정성왕후에게도 피를 말리는 초조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미 40대 중반이었던 영조는 더 이상 기다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갓 돌을 지낼 무렵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사도세자입니다.

본래 사도세자는 영특하고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일단 숨이 턱에까지 찰 정도로 조급했던 아버지 영조의 채근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신하들을 존중하는 겸손함을 채 배우지 못한 아기 시절부터 다음 왕위 계승자로 떠받들어진 사도세자는 맹랑하고 당돌한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군왕으로서 겸손함을 갖추기 원했던 영조는 열 살의 사도세자를 꾸짖으며 근신하기를 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근신령이 사도세자에게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사도세자는 책 읽기를 거부하고 늙은 궁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 궁녀는 영조가 왕이 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던 소론파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가득 품고 있던 사도세자는 그 궁녀의 감각적인 속삭거림에 아버지를 불의한 인간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영조와 계속 어긋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크게 벌어지자 조정은 다시 소론과 노론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세자가 아버지와 함께 노론을 싫어한다는 것은 안 소론은 노론을 몰아붙이기 위해 세자에게 접근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세자는 차기 왕이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극한 갈등, 노론과 소론의 파벌 싸움,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편 영조를 위로하고 아들 사도세자를 사랑으로 감싼 사람은 바로 정성왕후였습니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고,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이를 만류하는 궁녀를 세 명이나 무참하게 죽여버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길길이 뛰는 영조를 위로하던 정성왕후는 눈물을 흘리며 사도세자의 처소를 찾았습니다.

사도세자는 정성왕후를 보자 울면서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당장 죽고 싶다는 세자를 어루만지며 아버지 영조의 마음을 돌려보겠다고 약속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는 비극을 예고라도 하듯 궂은비가 내리는 겨울밤이었습니다. 오며 가며 찬비를 맞은 예순여섯 살의 정성왕후는 그대로 병석에 누워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보겠다던 아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정성왕후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정성왕후의 위중과 별세 때문에 사도세자를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무마되었고 사도세자는 몇 년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정성왕후는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화목하게 지내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부자의 갈등의 골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진 후였습니다.

홍릉의 문석인과 무석인. 아래쪽으로 정자각과 비각이 보인다.

정성왕후와 43년을 함께 살았던 영조는 정성왕후의 행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내 어머니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음에도 정성왕후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셔준 것이 대해 특히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듯합니다.

조선 왕릉의 건립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이 자신이 묻힐 수릉을 직접 지정하면서 죽은 후 영원한 세계를 보장받기 위함입니다. 또 선왕의 능을 정성껏 건설하여 자신이 효자임을 나타내고, 동시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한 이유도 있었지요. 일찍 별세한 왕비의 능을 정성껏 치장한 이유는 부부 간의 예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홍릉은 위의 이유 중 첫 번째, 세 번째의 두 가지 이유로 무척 정성들여 조성된 능입니다.

그런데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에 가보면 특이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능침이 곡장 안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쏠려 있고, 혼령의 위치에서 볼 때 오른쪽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쪽이 비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훗날 자신도 조강지처인 그녀 곁에 묻힐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자리도 미리 만들어놓을 것을 명했습니다.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인 산릉도감에 명해서 홍릉의 오른쪽 비어 있는 곳에 숭릉, 명릉의 예에 의거하여 ‘십(十)’자가 새겨진 돌을 묻어 정혈을 표시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왕이 왕비를 먼저 보내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놓은 것을 ‘신후지지’라고 합니다. 또 오른쪽을 비워둔다 하여 이런 제도를 우허제(右虛制)라고 하지요.

정자각 앞에서 보면 능 왼쪽이 비어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조는 자신이 정한 자리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자리를 정해둘 수는 있지만 그 자리에 묻히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후손들의 결정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장사를 지낸 왕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였습니다.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정조는 할아버지의 능지를 홍릉으로 거론했다가 다시 풍수상의 길지를 살펴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에 황해도사 이현모가 “홍릉 위쪽의 비워 놓은 자리는 곧 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으로서, 선왕께서 오늘날의 처지를 미리 염려하여 평소에 처리해 놓으신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풍수의 논리는 땅속의 일이라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니, 선왕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상소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중요한 관계가 있는 일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장릉(長陵)의 동구(洞口) 자리도 또한 먼저 정해 놓은 곳이었으니, 유독 선대왕께서 분부를 남겨 놓은 데가 아닐 수 있겠느냐?” 하고, 이현모를 삭탈관직 해버렸습니다. 결국 영조의 왕릉은 현재의 위치인 동구릉 내 원릉으로 결정되었고, 홍릉의 오른쪽은 썰렁하게 텅 비어 있는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조의 처사에 한 가지 납득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왕이 미리 마련해놓은 자리에 장사 지내지 않고 굳이 더 좋은 자리라고 새로 고른 원릉 터는 103년 전에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파묘 자리였습니다. 한번 파헤쳐졌던 곳이라 왕릉 터를 잡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기와 혈이 이미 날아간 터입니다. 말하자면 김이 새버린 터에 할아버지의 묘를 쓴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이지요. 연산군처럼 겉으로 크게 내색은 하지 못하고 참 소심하게도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조상의 묘 자리가 후손들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자신의 명운과 국운을 건 대대적인 복수였던 것입니다.

비어 있는 쪽은 주인 잃은 석물들이 있어 허전함을 더하는 듯하다.

홍릉은 왕비릉만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쌍릉이 될 것을 예상하고 만든 능입니다. 그래서 곡장은 물론 석물들도 쌍릉의 형식으로 서 있습니다. 왕비릉 능침은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그 앞에는 장명등석과 각 한 쌍의 무석인 ․ 문석인 ․ 망주석이 서 있고, 능침을 보호하는 양석, 호석, 마석이 역시 한 쌍씩 서 있습니다. 그러나 비어 있는 쪽은 경배하고 지켜줄 주인을 잃은 석물들이 있어 그 허전함을 더해주는 듯합니다. 살아서는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그들의 갈등 때문에 심하게 맘 고생했던 정성왕후, 죽어서는 남편과 손자 사이의 메워지지 않은 골 때문에 오른쪽 옆구리를 텅 비운 채 남편과는 멀리 떨어져 홀로 쓸쓸하게 잠들어 있게 되었습니다.

글 : 황인희(역사칼럼니스트 ‧ 인문여행작가) / 사진 : 윤상구(사진작가)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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