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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문학]아는 만큼 느껴진다 – 동구릉의 경릉
황인희·윤상구|21세기북스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에도 동구릉 이야기입니다. 동구릉에 가면 아주 특이하고 어찌 보면 아름답게까지 보이는 왕릉이 있습니다. 바로 제24대 헌종(憲宗)과 그 부인들의 능인 경릉입니다.

경릉에 들어가면 정자각이나 다른 부속물들은 여느 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초지 위에 세 개의 능침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입니다. 정자각에서 바라보기에 가장 왼쪽의 능침이 헌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의 능침이며, 가장 오른쪽이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의 능침입니다.

그런데 이 독특한 왕릉이 제 눈에는 아주 슬프게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저는 그 능이 만들어지게 된 슬픈 사연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같은 피사체라도 거기에 들어 있는 사연을 알게 되면 작가의 감정이 사진에 이입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사진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철컥철컥 셔터만 누른 사진과 작가가 자신의 감정과 감성을 담아 찍은 사진은 그 풍기는 매력이 다르고, 사진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다르다는 것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지요?

그럼 여러분과 그 슬픔을 함께 느껴보기 위해 이 아름다운 왕릉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경릉 혼유석의 총탄 자국이 현대사의 비극을 말해주는 듯하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장남입니다. 4세 때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그 해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헌종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헌종의 나이 8세였습니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대왕대비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지요. 순원왕후가 안동 김씨인 탓에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의 세력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11세가 되던 해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는데, 이 왕비가 효현왕후로 이도 안동 김씨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력이 더욱 탄탄하게 된 것이지요. 1841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5세의 헌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의 입김이 세어졌습니다. 모후의 가문인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경계한다고 나섰지만 정국은 두 집안의 세력 다툼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두 가문은 정권 유지에만 골몰하여 민생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기에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헌종이 재위한 15년 동안 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났고 국가 재정의 기반인 삼정이 문란해져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습니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내야 할 세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탐관오리들이 제멋대로 문서를 조작하거나 말도 안 되는 원칙을 내세워 백성들을 착취하면서 삼정이 문란해진 것입니다. 세금이라면 나라에 바쳐져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불법적으로 거둬들인 세금은 모두 개인의 부로 축적되었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백성들은 세금 이름으로 자행되는 관리들의 강도 행위에 극심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탄 세례로 경릉 무석인의 갑옷자락은 너덜너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또 길지 않은 헌종의 재위 기간에 두 차례의 역모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역모가 모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건 다 별다른 정치적 기반도 없는 중인과 몰락 양반들의 대책 없는 역모로, 당시 사회가 얼마나 왕실을 우습게 여겼는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이 역모는 두 번 다 사전에 발각되어 음모자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이원경도 사사되었습니다. 이원경은 훗날 철종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의 형입니다. 형의 죽음에 겁을 먹은 원범은 강화도 구석에 꼭꼭 숨어 외롭게 살게 된 것이지요.

순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헌종 때도 이어졌지만 천주교도의 수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교세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조정은, 오가작통법으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여 처형했습니다. 이것이 기해박해인데, 헌종은 기해박해를 계기로 척사윤음을 반포하였습니다. 이는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왕의 명령으로, 천주교를 믿는 것을 엄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해박해는 순조 때 일어난 신유박해와는 달리 정치적 목적은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항의한다는 빌미로 서양의 배들이 우리 해안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1846년에는 프랑스 군함 세 척이 충청도 앞바다까지 들어와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항의의 국서를 전달하고 갔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 문서입니다.

이렇게 헌종 때의 조선은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임금은 15년 동안 세도 정치에 휘말려 이렇다 할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1849년 2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헌종은, 효현왕후가 16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였습니다. 이 왕비가 효정왕후입니다. 헌종은 계비 간택에 직접 참여하였다가 훗날의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택의 결정권자인 대왕대비는 효정왕후 홍씨를 최종 간택하였습니다. 헌종은 3년 동안 기다렸다가 효정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헌종이 경빈 김씨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간택 후궁은 종2품 숙의로 책봉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경빈 김씨를 바로 정1품 빈에 책봉하고,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2년 동안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낙선재에서 그림과 글씨를 즐기며 지냈다고 합니다.

효정왕후는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903년 후사 없이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종 때 두 왕비는 효현성황후와 효정성황후로 추존되었습니다.

헌종 때의 역사 이야기는 여기까지이고 이제 경릉의 조성 과정에 있었던 씁쓸한 사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선조의 목릉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목릉에 물이 차고 불길하다는 원주목사 심명세의 상소에 따라 목릉을 천장했지요. 그러나 능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불길론’은 해소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묘를 썼다가 파헤친 자리는 기가 빠져나가 흉당이 되어버리지요. 그런데 효현왕후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한 것입니다.

경릉은 국내에서 유일한 삼연릉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왕이 살아 있을 때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곁에 자리를 마련하라는 유언이 없으면 왕을 왕비 곁에 장사지내지 않는 것이 전통 조선 왕릉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헌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들은 새로운 길지를 물색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열세 군데나 다녔지만 결국 이곳을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라 하면서 최고의 명당으로 추천했습니다. 파묘 자리는 흉당의 요소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왕의 능침을 조성한 자리도 문제입니다. 6년 전 효현왕후가 이곳에 묻혔을 때 중앙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럼 왕릉을 만들 때 능침을 열어 합장을 하든가 아니면 중앙에서 좌우로 자리를 다시 잡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냥 왕을 왕비 곁 치우친 자리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왕의 능호도 숙릉으로 정했지만 국장 기간에 영부사 조인영의 상소에 의해 효현왕후의 능인 경릉을 쓰기로 정하고 왕의 능호는 따로 정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또 왕릉은 왕기를 받기 위해 열 자 깊이로 파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헌종은 다섯 자(약 1.5m) 깊이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반 백성들 묘의 깊이에 불과한 것이지요.

헌종의 국장은 할머니 순원왕후가 주도했습니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의 뜻에 따라 이 모든 일을 벌였지요. 세도 정치에 의한 왕권의 유린도 기가 막힌데 삼연릉이 된 사연은 더욱 처절합니다. 1904년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73세로 세상을 떠나자 효현왕후 곁에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첩을 두어도 한 방에서 함께 지내지는 않는 것이 우리의 법도이지요. 원칙으로 하면 새로 언덕을 마련해서 효정왕후 능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하기 직전으로 나라가 기울대로 기울어버린 때였습니다. 정자각 등을 새로 짓고 석물들을 마련할 경황이 없어 효정왕후의 국장을 대충 치르고 삼연릉이라는 묘한 형태를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효정왕후도 정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지만 새 능호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경릉의 세 능침에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을 터서 서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난간석을 튼 것은 이 능침의 주인들이 부부지간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경릉의 삼연릉은 한 지아비가 한 방에서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능원의 장대석은 원래 초계, 중계, 하계로 3단인데 경릉에는 2단으로 되어 있어 중계에 있을 문석인과 하계에 있을 무석인이 같은 단에 서 있습니다. 문인, 무인의 차별이 무의미해진 사회 변화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각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놓여 있고 망주석, 양석과 호석, 문석인과 무석인이 각각 한 쌍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문무석인의 크기는 거의 실물대에 가까울 정도로 크지 않은데 아랫입술을 내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표정들을 짓고 있습니다.

경릉의 정자각과 비각. 비각에는 헌종이 황제(추존)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경릉의 석물들에는 한국전쟁의 흔적인 총탄 자국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 왕릉 중 가장 심하게 전쟁의 피해를 입은 능인 것 같습니다. 혼유석, 망주석도 총탄 자국으로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왕의 능침 앞에 서 있는 무석인의 등 뒤 갑옷은 옷자락이 너덜너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총탄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마주 싸웠던 남한군이나 북한군이나 어느 편에게도 왕릉은 공통된 조상의 묘였는데, 그 앞에서 서로에게 총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의 비극이 새삼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는 6 ․ 25의 비극이 역사책 속에만 들어 있는 옛날 이야기로 여겨지는데 이곳의 총탄 자국들을 보니 전쟁의 처절함과 절박함이 피부에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왕릉에 가면 이렇게 조선 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대의 역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경릉은 재위 순서로 보면 동구릉 가운데 가장 마지막 왕의 능입니다. 경릉이 만들어지고 비로소 ‘9릉’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경릉을 보고 그 사연을 들으면 조선의 국운이 다해감이 보이는 듯하여 쓸쓸해집니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왕으로서 제대로 할 일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죽어서도 왕의 대접을 받지 못한 헌종. 후손들의 골육상잔에 능까지 심하게 훼손되는 것을 겪어야 했던 비운의 왕과 왕비들. 그들이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라 해도 조금은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하여 뒤늦게나마 그들이 편안하고 조용한 잠을 이루기를 기원해봅니다.

 

글 : 황인희(역사칼럼니스트 ‧ 인문여행작가) / 사진 : 윤상구(사진작가)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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