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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문학]역사가 보이는 조선왕릉 기행사연 많은 무덤, 조선 왕릉 - 건원릉
황인희·윤상구|21세기북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의 ‘꽃’ 중에서

 이 시는 사진 찍기를 사랑하고 열심히 촬영하시는 분들께 꼭 소개하고 싶은 시입니다. 사진도 이 시에 표현된 ‘꽃’과 같습니다. 사진이 이름 없는 파일로 머물러 있을 때는 단지 그 사진은 수많은 파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진에서 사연을 찾아 소개하거나 최소한 제목만이라도 붙여놓아도 그 사진은 작가에게 ‘꽃’이 됩니다. 비로소 사진의 가치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진에 붙이는 이름과 사연으로 활용하기 가장 좋은 것은 인문학적 정보입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사진이라도 거기에 역사적, 문화적, 철학적 스토리가 담기면 사진은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른 바 서 말의 구슬이 꿰어져 보배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번 호부터는 사진 몇 장에 얼마나 재미있는 인문학적 정보가 담길 수 있는지를 ‘조선 왕릉 기행’을 통해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단릉 건원릉. ‘건원’이라는 말 속에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 가면 동구릉이 있습니다. 이는 한양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능역이라 붙은 이름입니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하여 아홉 기의 왕릉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입니다. 이곳에 가면 제1대 태조부터 24대 헌종까지 조선 왕조의 융성함과 쇠퇴함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왕릉을 꾸미는 형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아홉 기의 능이 한데 모여 있는 만큼 그 능역도 넓어 주변을 둘러싼 숲이며 개울물 등 무척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입니다.

1년에 한번, 한식 때만 벌초를 하기 때문에 건원릉은 잡초가 무성한 것처럼 보인다.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 1335~1408) 이성계의 단릉입니다. ‘건원’이라는 말 속에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가 들어 있고 그 이후의 능에는 건원릉과의 차별을 두기 위해 외자 능호를 붙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이자춘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성년이 될 무렵 원나라가 쇠퇴하자 중원에서는 명나라가 일어나고 만주 지방에서는 여진족이 새로운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또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한족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 홍건적은 고려를 때때로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360년에는 홍건적에 의해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는데 이성계는 자신이 거느리는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아냈습니다. 또 일본 해적인 왜구를 크게 물리쳐서 한반도의 남쪽 지방의 근심거리를 없앴습니다. 이런저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성계는 문무를 함께 지닌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가 되었습니다.
 조선 건국의 주도 세력은 학문적 실력을 갖춘 신진사대부와 무신 정권이 사라진 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 무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려면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와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로 나뉘었습니다. 역성혁명론자의 대표는 정도전이었고 고려개혁론자의 대표는 정몽주였습니다.

 어느 쪽 노선을 택할 것인지 최종 결정을 해야 할 무렵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와 담판을 지었습니다. 정몽주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죽교라는 다리 위에서 철퇴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역성혁명론자가 득세하게 되고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4년 뒤인 1392년 이성계는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조가 조선의 왕으로 등극한 다음해에 한양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여러 차례의 조사와 연구 끝에 조선 조정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북악산 아래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태조는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습니다. 명나라에는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배불 정책을 시행하여 한양에는 성균관을,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농본민생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고 농지를 개혁하여 민생의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조의 정치 ․ 사회적 역량과 노력과는 별개로 이성계는 무척 곤혹스러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후계자 지정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태조는 즉위 후 세자 책봉을 서둘렀는데 장성한 원비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계비 신덕왕후의 둘째아들이고 자신의 여덟 번째 아들인 11세의 방석을 세자 자리에 앉혔습니다. 유학의 이상주의 국가를 꿈꾸던 개국 공신 정도전과 남온이 유교를 바탕으로 한 신권 정치를 이루려면 왕권이 약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린 방석을 지지하여 이뤄진 일입니다. 당연히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중 조선 개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다섯째 아들 방원이 세자 방석의 주변 인물들을 제거하고 방석과 그 동복형인 방번을 살해했습니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태조는 몹시 상심하여 둘째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습니다. 첫째아들 방우는 고려의 신하로서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방원의 동복형인 방간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차 왕자의 난 때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박포에게서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은 방간은 확인도 해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방간은 방원의 군대에 패해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두려움에 떨며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태조는 태상왕이, 정종은 상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태종은 한양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습니다.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일컬어 흔히 함흥차사라고 하는데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태조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이 문안을 위하여 태조에게 차사를 보냈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조가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 말도 전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차사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태조가 죽인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것입니다. 함흥차사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이 태조와 태종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과장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한양에 돌아온 태조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묘 자리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애초 정릉은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정릉이 있어서 그곳의 지명이 ‘정동’이 된 것이지요.

태종은 병풍석을 청계천의 광통교를 고치는 데 사용하게 하는 등 계모 신덕왕후의 정릉을 훼손했다.

 그러나 신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태조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정릉을 훼손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릉 앞 100보까지 집을 지을 허가를 내주자 권문 세도가들이 앞다투어 수백 년 수령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태상왕 태조는 이 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은 차라리 멀리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아예 도성 밖 현재 자리로 이장해버렸습니다. 봉분을 깎고 묘로 강등해서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정릉에 있던 병풍석 등 석물은 청계천 다리인 광통교를 고치는 데, 목재는 중국 사신을 맞는 태평관을 짓는 데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태조의 능은 지금의 건원릉 자리에 조성하였습니다.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는 태조의 마지막 유언조차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도읍은 한양인데 태조의 능을 함흥에 만든다는 것은 조선의 정통성을 흔들 위험이 있었고 자신이 일으킨 골육상쟁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종은 좋은 묘 자리를 물색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1409년 전국에서 총 6천여 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본 따서 만든 능입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능침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고려의 능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이후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높고 큰 능침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병풍석은 능을 감싸고 있는 보호석으로써 모든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병풍석 밖으로는 열두 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호석과 양석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호석과 양석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언제든지 위험에 방비할 수 있도록 밖을 향하여 서 있습니다.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있고 그 밑에는 도깨비 얼굴이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이 있는데 건원릉은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다섯 개의 고석이 있습니다. 장명등석은 불교의 석탑에서 따온 석물로서 초기의 조선 왕릉에 남아 있는 불교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망주석 한 쌍, 마석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무석인 한 쌍씩이 초계와 중계, 하계로 나뉘어 놓여 있습니다.

정자각의 아래 석조 기단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들은 이곳이 6.25전쟁 때 격전지였음을 말해준다.

  건원릉의 가장 특이한 점은 봉분에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태조의 유언은 그대로 다 들어줄 수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수용하기 위해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한동안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억새풀이 무성한데 이는 함흥의 억새가 죽을까봐 일 년에 한번 한식에만 벌초를 하기 때문입니다.  
 건원릉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왼쪽에는 수라간 주춧돌이 있고, 오른쪽에 수복방 건물이 있습니다. 수복방은 왕릉을 지키던 신하들이 살던 집이고 수랏간은 제향을 지낼 때 음식을 장만하던 일종의 주방이었습니다. 수복방보다 앞쪽으로 커다란 비각이 있는데 이 안에 태조의 신도비가 서 있습니다. 신도비는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능침을 바라보고 정자각의 왼쪽에는 탁자와 같이 생긴 석물이 있는데 이는 제향이 끝난 후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입니다. 이도 역시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건원릉과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입니다. 정자각의 아래 석조 기단에는 이곳이 6.25전쟁 때 격전지였음을 말해주는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나 있습니다. 현대사의 비극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 글 : 황인희(역사칼럼니스트 ‧ 인문여행작가) / 사진 : 윤상구(사진작가)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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