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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와 초상사진의 발전[사진미술 이야기]
램브란트, '야경꾼'

1839년 사진이 발명되면서 사람들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사진이 인류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당시 사진발명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 것이란 기대는 많지 않았다.

특히 예술과 회화에 영향을 주리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정부에서는 아라고의 말대로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공헌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 정도였다. 하지만 당대 일반 서민들의 관심사는 거창한 과학 기술의 진보 보다는 사진을 통해 나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당대 사람들은 왜 초상사진에 많은 관심을 보였을까?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인간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면서 문학과 예술에 신 보다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회화에 인간의 몸짓과 표정이 보다 현실적으로 표현되면서 ‘초상화가’라는 새로운 직종이 나타났다.

왕족과 귀족 그리고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상공업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후대에 남기고 가문을 과시하기위해 이들로 하여금 초상화를 주문하고 장식하는 것을 즐겼다. 특히 귀부인들은 새로운 옷과 장신구를 기념하기위해 초상화를 애용하기도 하였다. 초상화는 서민들에게 늘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값비싼 초상화를 가질 수 없었다.

램브란트, '자화상'

그것은 곧 부와 권력의 상징이며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바로크 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특히 렘브란트(Rembrandt H Van Rijn)는 초상화로 부를 축적한 대표적인 화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자화상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램브란트를 초상화의 대가로 인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화상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조금도 이상화하지 않고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본인의 내면을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그의 작품을 시대별로 보면 꿈 많은 청년 램브란트에서 불우한 말년의 램브란트를 그림을 통해 대면할 수 있다.

그는 본인의 자화상 뿐만아니라 고객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있어서도 엄격한 객관성을 유지했으며 작가주의 정신을 담아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이 때로는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야경꾼’은 집단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린 작품인데 전체적인 조화와 명암대비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중앙에 빛을 받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둠에 갇혀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고객들로부터 항의를 받으며 걸작인 동시에 실패작(상업적)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그의 초상화 기법은 사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스튜디오에서 즐겨 사용하는 3/4 반신 초상사진과 렘브라트 라이팅은 렘브란트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다. 그 초상화 기법은 무려 400여 년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독립 자화상을 최초로 그린 사람은 북유럽 르네상스에 영향을 준 독일의 알브레히드 뒤러(Albercht Durer)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전에도 초상화는 그려졌지만, 대부분 관찰자의 시각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한 부분에 그려진 정도였다. 초상화의 인기는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으며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화가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초상화는 18세기에 이르러 보다 널리 보급되었지만 여전히 서민들에게는 부담스러웠다. 오랜 기간의 수련과정을 거쳐야하는 초상화가의 한정된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으로 초상화의 가격은 여전히 고가를 유지했으며, 중 상층 이하의 서민들은 초상화를 소유할 수 없었다.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삼류화가를 통해 제작을 하였다. 때문에 1839년 사진의 발명은 이러한 초상화가들을 긴장하게 했다. 초상화가 들라로슈(Paul Delaroche)는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고 했다. 그의 염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사진발명 당시 초상화가들은 더욱 정교한 초상화를 만들기 위해 또는 좀 더 쉬운 방법을 찾아 흐릿한 사진이미지 위에 채색을 하는 방식으로 초상화를 완성했다. 하지만 초상사진이 발달하면서 대부분의 초상화가들은 초상사진을 수정하는 일을 담당하거나 초상사진가로 전업했다.

다게레오타입이 발명된 후 불과 10년 만에 사진이 초상화를 대체하게 되었는데, 초창기 2~30분 소요되었던 노출시간이 렌즈와 감광판의 발전으로 불과 1초 이내로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인상사진가들 중 예술초상이라고 하는 고가의 초상사진을 촬영한 에티엔 카르자(Etien Carjat)와 펠릭스 나다르(Nadar) 역시 캐리커처 및 풍자만화가에서 사진가로 전업한 대표적 인물이다. 나다르의 스튜디오는 최초의 프랑스 사진협회 사진전람회와 최초의 인상파 미술전시가 열렸던 기념비적인 장소이기도하다.

나다르가 촬영한 영화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사진은 모델의 내면을 담은 예술초상사진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나다르는 인물의 내면을 담기위해 안정적인 자세로 오랜 시간 주시하며, 모델이 평소의 습관과 생각 그리고 성격에 따라 행동하게끔 유도하여 촬영했다고 한다.

낯선 환경에서 모델은 긴장하게 되며 그 순간은 모델의 진실 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상사진은 초상화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한 사진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생물학적 분류로서 광범위한 개념의 인물사진보다.

초상사진은 인물의 내면은 물론, 그가 살아온 삶이 사진을 통해 표출된 예술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인물사진과 초상사진에 대해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미학적 개념으로서 초상사진은 인물사진의 범주 안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진에 인물이 어느 정도 차지하고 있는지, 머그 샷 같은 단순한 기록을 위한 인물사진인지, 스냅 샷으로 찍힌 인물사진인지 등에 따라 초상사진과 인물사진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의 발명이 초상사진에 대한 서민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듯 했다. 그러나 사진발명 초기 다게레오 타입의 초상사진 가격은 초상화에 비해서는 저렴했지만 여전이 고가로 팔렸으며 특히 나다르와 같은 사진가는 유명인들이 주 고객이었던 만큼 서민들이 소유할 수 있는 가격대는 아니었다.

1858년 아돌프 유젠느 디스테리는 대중의 취향을 간파해 한 장의 원판에 8장의 사진을 만들 수 있는 명함판사진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여러 장의 귀족풍 명함판사진을 주변사람들에게 명함을 대신하여 나눠주었다. 스튜디오 웨딩사진처럼 고객들은 똑같은 무대 세팅에서 같은 모습으로 촬영되지만 사실보다 환상을 구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만족했다.

디스테리의 사진관이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의 독특한 촬영 방법 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 누구나 부담 없는 가격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소유할 수 있는 명함판 사진으로 디스테리는 비로소 초상사진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유섭 카쉬, '처칠'

20세기를 대표하는 초상사진가인 유섭카쉬(Yousuf Karsh)는 인물의 성격을 담아내는데 천부적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촬영한 윈스턴 처칠의 초상사진은 평소 그의 성품을 그대로 담아낸 사진으로 카쉬는 그가 물고 있던 시거를 빼앗는 순간 인상 쓴 처칠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촬영했다.

처칠은 방송과 신문에 늘 시거를 물고 있는 엄격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시거와 처칠은 늘 하나로 묘사되었지만 카슈는 화난 처칠의 모습을 담기위해 무례함을 저지른 것이다. 이 후에도 카슈는 각국의 유명한 정치인과 예술가 등 많은 유명인을 촬영했다. 카슈는 인물의 성격과 직업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인물과 사물을 적절히 배치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피사체의 성격이 가장 잘 표현되는 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물며 관찰하곤 하였다.

아놀드 뉴먼, '이골 스트라빈스키'

카슈와 동시대의 초상사진가인 미국의 아놀드 뉴먼(Arnold Abner Newman)은 카쉬와 다른 접근으로 인물의 직업과 성격을 표현한 사진가다. 카슈가 인물의 클로즈업을 선호한 반면 뉴먼은 인물과 사물의 조화를 통한 인물묘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촬영한 러시아의 작곡가 이골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초상은 전체 구성 중 인물 보다 배경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초상사진임을 알 수 있다. 예술초상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인성과 습성 그리고 정체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1856년 영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한데 모아 놓은 최초의 초상화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에는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외에도 폴 메카트니와 같은 대중 가수의 초상화도 전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패션사진도 초상화로 분류되어 보그와 하퍼스바자르의 패션사진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초상화와 사진에 대한 논쟁이 더 이상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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